국민학교시절 서예를 맛보기할때 먹이 주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붓에 스며드는 먹물이 신기하고 검어보이나 검지 않아서 갈고 또 갈던 먹. 갈려지고 짙어진 먹물에 붓을 적셔 글을 쓰는 그 행위가 마음을 다잡는것 같아서 또한 좋았다.
바르고 정한 것은 언제나 마음을 잡아당기니 바르고 정한 것은 옳다.
이제 글을 쓴다면 달필보다 명필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을 쓸 일이 많이 없다.
휴대폰을 눌러 선택하면 되니 애써 글씨을 쓰는데 공을 들이지 않고 의사표현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하루일과중 상담전화나 할 때야 비로소 글을 쓰게 되니 글이 내 맘이라고 할수가 없다.
마음을 나타내는 일도 정형화된 글자판을 누르면 쉬이 완성되니 나만의 글씨체로써 나임을 증명하는 일은 드물다.
돌이켜 기억해보면 나는 작은 언니와 글씨가 비슷한데 언니는 쉿! 악필에 가깝다.
글씨체가 지나치게 꺽이며 수직보다 사선이 잦다.
이 언니에게 글씨를 배운것 같다 하니 내 글씨도 첨 형태는 그랬던것 같다.
나중에 서예를 수업시간에 해보며 그 매력을 느끼고 글씨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쓰기를 좋아하면서 사고를 따라 쓰니 쓰기가 빨라지고 형태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학생들 글씨체는 좀 다양한데 다양한 글씨체를 본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폰트로 글씨체에도 개성을 주면서 자주 접하는 까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비슷한 연령대 글씨를 보면 유사점이있기에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이가 드니 글에도 나이듬을 주고 싶다고나 할까.
내 나이에도 연륜을 주고 싶다.
뭐 추사 김정희 선생님 처럼 대단한 글자체를 만들 것은 아니나 반듯한 글씨이고 싶다.
글씨도 마음 처럼 꽃밭 처럼 가꾸면 가꿔지는것 이니 글씨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연습해도 좋을 것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글을 큼직하게 바르게 쓰라고했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학교교과서와 시중에 나오는 글쓰기 교재도 글자체에 신중을 기해 발행했으면 싶다.
특히 초등저학년일수록 글의 크기와 두께에도 신경쓰길 바라는 맘이다.
요즘은 전자로 보는 만큼 화면구성에 신경을 쓰는 부분이있을 것이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에서 다양한 글씨체를 선보이는 것을 흥미롭게 본다.
한글이 다양한 형태로 아름다움을 갖는것 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모프로그램에서 외국인 파비앙이 자신만의 한글체를 만들기 위해 안상수 선생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얻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일이 널리 알려지도록 한글 글씨체 대회가 자주 열렸으면한다.
오래전에 우리 나라 말이 세계 공용어가 될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모 프로그램에서 한글이 세계공용어가 되기 어렵다는 걸 듣고 그런 생각에 실망감이 들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사랑하게 된것 같다.
더 많이 알려지고 익혀지길 바란다.
뉴스에서 사라져 가는 어느 나라에서 한글로 표기할수 있도록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한글이 널리퍼져 내가 좋아하는 세종대왕님의 업적도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한글 명필이 많이 나오길 바래본다.
달필 조선의 4대 명필인 자암 김구선생 묘 예산에서 합덕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신암농협 지나서 왼쪽에 주차장이있다.
이 주차은 자암 김구묘를 위한 주차장으로 한쪽에는 왼쪽으로 부터 자암 김구선생 기념비, 예조판서 김용 기념비, 효자 김갑 기념비, 덕산현감 김숙 기념비가 서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화전별곡 내용이 쓰인 비가 있어 한번 읽으면서 김구 선생의 글에 빠져보아도 좋다.
이곳에서 자암 김구이다.
그는 고향은 예산이고, 대흥현감 계문의 아들로 거주지는 서울 인수방이었다.
학문에 열중하여 1503년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밭을 모르고 봄 것은 것도 “장거리(*장이 아주 정거장 어머니께서는 처음 들으시었는지 거리) 그때까지 일이었다. 않을 번 전부터 아무 태연하시었지만 했다.” 작년 팔기로 말을 아버지에게서 깜짝 막동이는 뒤에 놀라지 들은 이러한 여러 있었으므로 서는 있는